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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한국방위산업의 씨앗을 뿌리다

자랑스러운 방산인 ① 이승만 대통령




우리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이 많다. 6.25가 발발하기 전까지 이승만 정부와 우리 군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을 놓고 있다가 북한의 기습에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승만 정부와 우리 군은 1948년부터 각 군별로 병기창을 만들고 각종 무기개발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6.25란 우리 민족의 비극 앞에 모두 가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이승만 정부와 우리 군이 정부 수립 이후부터 얼마나 활발하게 무기개발에 열을 올렸는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군사기술 환경이 매우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독자적인 무기생산 및 연구개발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1948년 12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을 창설했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병기공창이었고, 주로 수류탄, 지뢰 등 소형 병기와 탄약부품 및 병기 부속품의 제작생산, 정비 및 재생 업무를 수행했다.

1949년 12월 15일 국방부에 ‘병기행정본부’가 창설되면서 육군병기공창이 병기행정본부 예하의 ‘국방부병기공창’으로 격상되었다. 병기행정본부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15일 병기공창 산하의 제1공장과 제2공장을 ‘제1조병창 및 제2조병창’으로 확대 개편했으며, 병기와 탄약의 연구와 시험을 위해 ‘과학기술연구소’를 창설했다. 이로써 군수공장과 연구개발기구를 구분하여 개발과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과학기술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 군사과학기술을 연구한 최초의 연구소이다. 병기행정본부는 화학, 기계, 금속, 전기 등 모든 기본적인 기술 분야를 다루었고, 병기제조뿐만 아니라 민수 분야의 각종 생산기술 문제까지 담당함으로써 국가적 기술센터의 역할도 수행했다. 1952년 10월 1일 제1・2조병창은 국방부 조병창으로, 과학기술연구소는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로 각각 개편되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연구소는 부산에 위치하여 당시 우리나라 화학계의 선구자였던 안동혁 박사 등 최고 권위자들을 연구지도진으로 초빙하고, 성좌경 교수 등 현직 교수들을 대거 연구진에 참여시켜 국가 총동원 연구체제를 구축했고, 전자현미경, X선분석장비 등 연구실험 장비들을 확보하고, 병기 및 탄약 연구, 군용 식량 연구, 각종 군용 재료 연구 등 다수의 실적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정부, 19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3단 로켓 발사 성공

국방부병기행정본부 산하의 과학기술연구소는 1953년 부산에서 복귀한 후 1954년 7월 14일 대통령령으로 국립연구기관인 ‘국방부과학연구소’로 격상되었다. 국방부과학연구소는 군용 식량, 피복, 유・무기재료, 원자력 이용, 로켓 등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고, 13건의 발명특허를 획득했다. 1959년 7월 27일에는 인천시 고천동 해안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로 3단 로켓 발사시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국방부과학연구소는 1961년 8월 6일부로 해체되면서 새로 창설된 ‘육군기술연구소’로 흡수되었다.







한국 해군, 6.25 이전에 함정 및 수상항공기 건조

해군은 6・25전쟁 이전에 최초의 수상함인 제1충무공호를 건조하는 등 독자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했으며, 1951년 3월 23일 해군본부 함정국 산하에 ‘해군기술연구소’를 창설하여 함정기계, 함정재료, 특수무기, 유・무기화학 및 전기화학, 함정전기 및 전자장비 등에 대한 연구를 했다. 1951년에는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여 해군용 특수탄 및 잠수함용 축전지, 함정용 디젤기관 연구개발을 수행했다. 1951년 7월에는 수상항공기 통해호(統海號)를, 8월에는 두 번째 수상함인 제2충무공호를 건조했다. 1952년 9월에 재단법인 해군기술연구소는 참모총장 직속으로 새로이 설치된 해군과학연구소에 흡수되었다. 해군과학연구소는 해군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확대 개편되어 연구개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8년 11월 15일에 해체되었다. 







한국 공군, 6.25 전쟁 중에 ‘부활호’ 경비행기 제작에 성공

공군은 195211월 공군기술학교를 중심으로 부활호(復活號)’라는 이름의 경비행기 설계 및 제작에 착수하여 시험비행에 성공한 바 있다. 1958315일 제81항공수리창 내에 공군기술연구소를 창설하여 항공 관련 기술자료 수집, 실험용 소형로켓 제작, 전단살포용 풍선 개발, 2인승 글라이더 개발 등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나, 공군기술연구소는 196341일 해체되어 그 기능이 제81항공수리창으로 흡수되었다. 81항공수리창은 196910M-73 활공기 비행시험 성공, 19727월 PL-2(새매) 경비행기 비행시험 성공 등 자체적으로 꾸준히 연구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2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원자력산업의 씨앗을 뿌리다

우리나라에서 핵(원자력)개발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의 국비 유학생을 원자력 분야에서 보내도록 했고, 정부 조직에 원자력 담당부서(원자력과)와 서울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창설했으며, 원자력원(후에 원자력연구소)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부총리급을 임명하고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TRIGA Mark-II 도입과 1958년 원자력법 제정 등 원자력산업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수준의 원자력강국이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원자력에 대한 관심과 기반 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2월 2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은 잠수함도 스스로 만드는데, 미국의 대한(對韓)원조가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도 자립해야 한다. 그러니 원자력을 개발하고 군비(軍備)에 관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대(代)를 이을 기술자를 길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당부한 바 있다. 이때 언급한 원자력 개발은 핵무기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이승만 정부의 ‘방산씨앗 뿌리기’ 정책은 1970년 8월 6일 대통령령 제5267호 ‘국방과학연구소 직제령’이 공포되면서 각 군에 흩어져 있던 병기 연구소들이 ‘국방과학연구소’로 흡수되었다. 이 당시 국방과학연구소는 연구소 건물도 없었으며,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던 이공계 과학자 및 육군기술연구소에 있던 연구원 등 60며 명이 전부였다. 대한민국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들의 열정이 우리나라 방위산업이 성공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또 방위산업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현대화 및 산업화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을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너무 쉽게 잊고서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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