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신이 2주 안에 교수형 당할 것을 안다면 그것은 그를 엄청나게 집중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Samuel Johnson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근 서울과 워싱턴에서 나온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암시를 보며 놀랄 것이고, 이러한 움직임이 한국과 일본 양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나의 미래 예측에 대한 가설과도 일치하는 전개이다. 즉, 북한이 처음에는 남한의 방위력을 낮추고 그 다음에는 남북 연합체를 통해 남한을 통치하면서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반대자들을 정치/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들의 재원을 빼앗는 행위를 통해 전쟁, 주둔 혹은 문화적 침해 없이 남한을 협박과 회유를 통해 정복할 것이라는 것이 그 가설이었다. 판문점 합의는 북한이 민족-국가주의를 우선시하고 자유 민주주의 가치의 보호보다는 북한과의 유화를 강조하는 남한 정부와 협업하고자 하는 기대에 불을 붙일 것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떠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 희망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문재인이 우리가 떠나는 것을 아직은 바라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미군이 너무 시기상조로 철수하게 되면 이는 남한 내에서 정치적 반발을 불러 일으켜서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문재인은 문정인을 이용해서 미군철수를 암시하는 동시에 공개적으로는 이를 부인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군 주둔 비용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재정 부담에 대한 협상을 미루어 그로 인해 증가될 수 있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정치적인 명분을 취득하게 된 후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북한 정권에 대해 남한이 판문점 합의를 존중할 것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셋째는 중도 우파 유권자들의 정치적 반발을 막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문재인 정부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을 믿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그러한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 문재인은 미국에 대해서는 남한의 생각만을 대변한다고 전달하면서 북한과 합의문에 서명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안심시킨다 (*역자 주: 북한한테는 북한 생각도 하고 있다고 안심시킨다). 문재인 정부는 (종종 폭력적인) 반미주의자들에게는 드디어 미국이 물러간 뒤 남북한 연합체가 곧 실현된다고 믿게 하면서, 미군철수에 경계심을 갖는 중도우파 유권자들에게는 미군이 한반도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라고 믿게 한다.
문재인 정부가 사용할 이런 방법을 통해 보수 우파들은 미국이 덮어주는 따듯한 안보 담요를 발에 덮고, 옆으로 누워서 다시 잠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한편 문재인 정권은 자신의 반대 세력에 대하여 점진적이고 은밀한 검열을 계속할 것이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남한 의회의 3분의 2 이상의 압도적 다수 의석을 문재인이 차지하게 되고,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 이름 붙여진 “민주주의” 행동가 임종석의 손에 대한민국 헌법을 재작성할 수 있는 견제장치 없는 권력을 쥐어주게 되어 나의 가설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한국 전쟁에서 우리가 알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다.
안전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제공하는 안보 담요
명백한 사실부터 적시하자. 대한민국의 안전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불안한 한국정세는 세계 경제의 엔진인 지역에서 세계를 경기 침체로 몰아 넣고, 난민 위기를 일으킬 것이다. 이는 전세계의 동맹국들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미국의 영향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시리아와 북한에서 김일성이 통치한 이래로 진행되고 있는 인도주의에 대한 위기를 훨씬 능가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국가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 질문들은 필자가 20년 전에 육군 장교로 한국에 도착한 이래로 계속 갖고 있던 의문이다. 즉, 주한미군의 존재는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가 저해하는가? 남한은 여전히 북한의 정예병사들이나 중국의 인해전술 부대의 침략 위협에 전통적으로 직면해 있는 가난하고 포위 당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인가, 아니면 우리 미군은 한국을 (그들 자신의)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인가? 미군의 현재 태도는 여전히 현재 진행중인 위협에 대응한 것인가 아니면 1970년대 모델의 위협에 고착되어 있을 뿐인가? 미국이 풍요로운 한국에 제공하는 안보 담요가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안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들어서 경솔한 정책결정을 하도록 돕고 있고, 이러한 현실이 전통적인 침략위험보다 대한민국에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닐까?
(2010년 이후에는 그렇게 이해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남한에 주둔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북한과 중국에 대해 남한에 대한 공격은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서 북한의 대남 공격을 억제하기 위함에 있다. 또 다른 주둔의 이유는 한국의 방위 공백을 메워주기 위함인데, 문제는 남한이 하늘처럼 높은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를 가진 부유한 OECD 국가가 되었으나 미국(3.3%)보다 낮은 비율로 방위비를 지출하고 있고(남한은 2.6%) 또한 큰 적들로 둘러싸인 또 다른 국가인 이스라엘이 5.7%를 지출하는 것에 비교하면 훨씬 더 낮은 비율의 방위비를 지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사람들은 주둔에 대해 제3의 이유를 제시한다. 즉, 미래에 있을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의 보복을 억제하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의 대남공격 억제와는 정 반대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언급되지 않는 네 번째 이유는 한국에 투자한 투자자에게 충분한 안전을 제공하여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의 붕괴를 방지하고 자본 이동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한 미군 부대 근처의 마을과 인근 지역에 대해서 미국 군인들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봉급은 중요한 수입원이자 골칫거리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문대통령의 미군철수 담론을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한국의 중도좌파는 간혹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해서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돕기 위해 미군이 남한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시인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의 많은 다른 주장들처럼 이 주장은 더 열심히 생각해볼수록 더 멍청한 소리로 들린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서 물러나고 한국이 자체적으로 현재 미국이 미군에 지출하는 비율의 GDP를 지출해야 한다면 – 이스라엘의 지출비율은 말할 것도 없고- 결과적으로 거대한 횡재를 얻게 되는 것은 General Dynamics, Lockheed Martin과 Raytheon 社일 것이다. 미국만이(그리고 이스라엘이) 남한이 북한의 미사일, 로켓 및 포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갖고 있다. 미군의 화력이 없다면 문재인은 그의 젊은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군복무기간이 연장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내 브로커에게 전화를 한 다음 바로 실험해보아야 할 이론일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 정부는 신뢰할 만한 국방력을 북한에 대한 유화책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국방비 지출을 전혀 늘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러한 정부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켜낼 정도로 충분한 병사를 갖고 있지는 않다.
이익의 불균형 확대
남한에서 그렇게 거대한 미군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한쪽 국가에 대해서 건강하지 못한 안보 의존증을 제도화시켰으며 다른 한쪽 국가에 대해서는 건강하지 못한 재정적 의존증을 제도화시켰다. 워싱턴에서, 자금이 충분한 한국정부의 로비가 존재하며 이러한 로비는 미국과 남한 사이의 이익의 불균형에 대한 의문을 억압하기 위함을 주 목적으로 하며 우리의 정책 논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존재한다. 특히 남한에 좌파정권들이 들어서고 나서 미국 씽크탱크가 자신의 학자들이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들에 대한 자금지원이 삭감될 수도 있다.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은 이런 종류의 로비에 관여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점점 더 감사하게 느끼고 있다. 씽크탱크들이 더 커져만 가는 이익 불균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면 나라도 여기에 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새로 등장한 의문은 문재인이 김정은에 대한 제재 효과를 저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행위를 통해 전쟁을 통하지 않고 김정은을 무장해제하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미국의 전략을 저해하기 위해, 김정은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재정적 생명줄들을 어떤 식으로 계속 붙잡고 있을지이다. 문재인은 그의 이 같은 전략의 위험에 대해 위험천만할 정도로 태평스럽다.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자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미국의 대규모 주둔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론 조사를 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아는 것이 적을수록 그들의 견해는 바뀌기 쉽고, 미국인의 지식의 깊이를 생각해 볼 때, 이 사실은 마음을 전혀 안심시키지 못한다.
많은 한국 전문가들조차 과소 평가하고 있는 점은 한국에 젊은 미국인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남한국민들의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정치적 지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한국인 대부분이 미국인들이 머무르기를 바란다는 지속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관찰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한사람들이 우리 군인들이 자기들이 사는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를 바라며, 특히 다른 사람의 이웃동네에 갇혀 있다면 더욱 좋고, 다른 사람의 누이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두 번이나 연장하였고 가능했다면 기꺼이 다시 연장했을 나의 4년간의 한국에서의 주둔기간 동안 나는 대규모의 미군 주둔을 지지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때 내가 목격한 것은 엄격히 군사적 조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충돌과 관련된 분쟁들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적과 내가 공유하는 경향이다.
알코올 중독(toxicity), 의존증의 동반자
한국에서의 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볼 때 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차원에서는 미군이 머무르기를 바라지만 감정적으로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감정을 두고 볼 때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라는 것이 놀라울 일인가? 한국 내 반미주의자들 중 일부는 정치적으로 시니컬하고, 폭력적이며 종종 인종차별적이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더 발전되고 더 잘 배운 사회 구성원이 월급날만 되면 돈은 갖고 정신 줄은 놓아버린 채로 이웃을 돌아다니는 상스러운 (그리고 종종 인종차별주의적인) 젊은 병사들에게 느끼는 자연스럽고 이해할만한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은 언제나 의존성을 동반한다. 남한 사회의 유독 심한 국가주의, 정부 검열에 빠지기 쉬운 경향, 길들여지지 않은 국가보안 기관, 위험할 정도로 경솔하고 충동적으로 변경되는 국가 안보 정책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남한의 불균형한 정치발달은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호의가 미국 특유의 서투른 방법으로 실천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내가 4년 동안 한국에서 군 생활을 한 것이 나 자신의 삶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해주었는지 여부와는 상관 없이, 나는 오랫동안 대규모 미군의 존재가 군사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에 비해서 정치적 목적에는 더 큰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해왔다. 나는 한국의 군사법원에서 변호인으로 일하면서 젊은 사병과 전문가들(Specialists), 하사관들이 갚지 못할 수표를 발행하고 싸울 가치가 없는 듯한 러시아 바의 호스티스를 두고 벌인 싸움을 기억하지도 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 아내를 만나고 문명화의 영향에 굴복되기 전 마지막 방황의 기간 동안 나 또한 너무 많은 밤을 비슷한 패턴으로 지내며, “한국인만 출입 가능”한 클럽에서 거절당하고, 나이 많은 여사장님이 소주와 닭꼬치를 파는 가게에서 술 취한 병사들이 소리지르는 것을 부끄럽게 바라보아야 했으며 이런 병사들 중 내가 월요일에 대기실에서 만나서 군법 제15조 사건의 변호를 맡아줘야 할 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씁쓸함을 안겨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내 경력상 나는 군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국에 있는 우리 군의 구조가 – 한국 전쟁에서 미군의 즉각적인 개입을 염두에 두고 있는 – 새로운 정치적 현실과 기술에 맞추어 변경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북한이 우리가 아시아에서 싸우게 될 지상전의 조건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 현명한 처사일까? 남한에 많은 수의 지상병력을 주둔시키면 무력대립 첫 주 동안에 많은 인명 손실을 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라크에서 4,000 명의 병사가 사망 한 것이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손실이었다면 한국의 지상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그에 대해 미국인들이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특히 청와대에 신실하지 못한 동맹이 들어온 것이 그러한 구조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에 진행되었어야 할 재평가를 할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다. 이 기회에 우리는 우리 군대의 구조를 현재 시점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도록, 비용은 줄이면서 이익은 극대화하도록 재고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남한이 그러한 미군의 존재가 없으면 더 강해질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경솔한 국가안보정책을 채택하는 후보들을 선출하는 것을 직접 지켜본 결과 외로운 젊은이들이 필연적으로 남의 땅을 휘젓고 다닐 때 생기는 마찰에 더해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봤다.
이 점이 내가 주한미군의 구조, 규모 및 목적에 대한 조심스런 재고를 환영하는 이유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단서가 붙는다. 첫째, 주한 미군의 올바른 구조가 무엇이든 간에 이 사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북한과 협상할 의제는 아니다. 둘째, 주한 미군 재구조화 추진은 어떠한 협상 도구나 분노의 표현이 아니고, 남한이 군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감을 갖도록, 국가 감각을 갖도록, 그리고 의존주의에서 벗어나 성숙한 민주주의의 길로 발전해 나가도록 돕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 되어야 한다.
남한은 미사일 방어 체제 에 더불어 “Sisu(싸울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미군이 철수한다면 남한이 베트남처럼 되지는 않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로, 역사적인 차이점이 있다. 만약 남부 베트남 군 전체가 Lê Minh Đảo 장군과 그의 제 18 사단이 Xuân Lộc의 절망적인 최후의 방어전에서 보여준 용기로 싸웠더라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 베트남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이공이 1970년대의 오일 쇼크와 미국의 군사 원조 중단으로 인해 쇠퇴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결국 자신감 결여와 국가적 결속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쇠락한 것이다. 거의 언제든지, 전쟁에서는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큰 쪽이 화력이 큰 쪽을 이긴다.
필자는 남한과 같이 적대적인 이웃 나라들로 포위되었고 인구도 적고 땅도 작은 나라가 외국 군대의 지원 없이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던 다른 나라의 예들도 들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핀란드화”라고 하면 더 강한 이웃에 대해 조건부로 항복하는 것을 뜻하지만, 핀란드가 소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한 1939년도부터 1940년도까지의 겨울전쟁은 위와 같이 작은 나라가 스스로를 방어한 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이다. 핀란드의 용감한 자기 방어는 핀란드의 독립을 지켜냈으며 이 나라를 스탈린의 공포정치로부터 보호하였다. 핀란드에는 수적으로도 적에게 압도되고 장비도 열악한 병사들의 냉혹한 결의를 표현하는 용어가 있다: sisu가 그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군대가 필요로 하는 화력을 어떤 방법으로 지원해줄 지에 대해 토론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화력은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더 결정적인 문제는 과연 남한 사회에 sisu가 있느냐가 될 것이다.
남한과 더 비슷한 예는 이스라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작고, 수적으로 적에게 압도되어 있고, 민주적으로 까다롭지만 국가적 결집력이 있고 군사 무장이 잘 되어 있는 나라로, 미군 없이도 그리고 핵 무기를 갖기 전부터도 자기보다 규모가 큰 국가의 수많은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오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자신감 있는 남한이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해야 할 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핵무기는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한국, 대만,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할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생각해 볼수록 내 마음은 편해진다.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는 세계 안보를 결코 위협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핵무장은 강력하고 약탈적인 소련에 대항하여 전후의 힘의 균형을 재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유럽의 평화를 수십년간 보장해주었다. 내가 보기에 더 위험한 상황은 아시아에서 힘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 즉 가장 덜 민주적이고 가장 공격적인 국가들이 대량살상무기를 독점적으로 갖고 있는 데에 비해서 가장 민주적이고 덜 공격적인 국가들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는 상황이 더 위험해 보인다.
만약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바와 같이 북한이 불가역적으로 핵무장 국가임을 인정해야 한다면 우리가 남한과 일본 스스로가 그들의 핵 억지책을 갖는 것이 정당함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은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리적으로나 인구적으로 압도하지만 이론상으로는 우리와 동맹국 하나만 힘을 합쳐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우리와 대적할 깜냥이 못 된다. 우리의 동맹국이 실질적으로 이렇게 못하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대항하여 단결하기보다는 독도와 같이 중요성이 떨어지고 고대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감정적 쟁점을 두고 국가 안보정책을 경솔하게 펼치기 때문이다. 나는 남한이 가만히 있는 일본에 대해서 수사적(rethorical)으로 공격하는 것의 근원은 남한이 그들의 역사와 국가적 지위의 불안전성에 대해 심리적 보상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민족주의는 국가적 지위(nationhood)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 아니던가? 만약 핵무기가 북한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국민에게 국가적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데 도움을 줬다면, 남한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대 맞으면 우는 소리가 나온다
오늘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통상적인 침공이 아니라 포격, 로켓, 미사일 및 기타 제한적인 소규모 공격으로 남한의 전략적 지위와 경제적 활기를 점진적으로 깎아 먹으며 공포로 위협해서 굴복시키는 형식의 것이다. 그러한 전략은 만약 남한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또 응집력이 있다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보기에 이 두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9 %가 최근 김정은과의 정상 회담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한다. 그중 78퍼센트의 사람들은 현재 김정은을 “신뢰한다”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나는 인류 자체의 묘비명이 될 수 있는 소설 1984의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승리를 성취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사실, 이 회담은 남한은 구체적으로 얻은 것이 하나도 없고 남한 경찰을 북한 검열기관으로 만들어버린 남한의 일방적인 항복이었다. 이 회담에서 남한은 유엔 대북제재의 효과를 저해할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약속했고, 북한이 평화적 군축을 할 것이라는 희망을 제거해버렸고, 따라서 전쟁을 거의 피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 회담에 의해 북한의 비핵화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이로 인해 “평화” 회담에서 그들의 새로운 여자지배자(*역자 주: 김여정)에게 속삭일 암구호도 없이 남한은 북한의 나른한 자비에 기대야 할 것이 보장되었다. 이 결과를 내가 이 블로그에서 10개월 전에 인용한 여론조사 결과와 비교해보라. 이 여론조사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사드배치를 찬성했고, 개성공단 재가동에 반대했으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재개를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여론의 변화는 집단 공포에 가까운 변덕을 보여준다. 문재인은 10개월 전에는 햇볓정책을 되살리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수 있으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는 그런 정당성을 갖고 있고, 6월 13일에 있을 국회 의석 11개에 대한 선거는 그의 정당성을 더 뒷받침해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우파는 문재인의 더불어민주당이 인터넷 댓글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에 매달린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여론조사기관이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거나 신뢰할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고, 혹은 여론조사의 결과를 비교해 보았을 때 이 결과가 선거 결과나 판문점 합의의 국회 비준 여부나, 개헌이나 혹은 북한이 하나의 국가 두개의 체제라고 이해하는 고려연방제에 대한 지지율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론조사가 틀렸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주장은 선거에 질 것이 예상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여론조사는 그렇게까지 틀리지는 않다. 다만 여론조사 결과는 놀랄만큼 빠르게 예측가능 하지 못한 이유로 다시 바뀔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예측(끔찍한 것도 포함하여)이 맞은 경우가 많다고 자부하지만, 나는 김정은 외의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 좋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한 “평화” 절차에 대해 한국인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능력이 있다고 과대평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나조차도 충분히 비관적이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많이 배우고 지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투명한 간계에 넘어가거나 그들의 운명을 교활한 사이코패스에 맡기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치정부를 운영할만한 역량과 비례하여 튼튼하다. 앞으로 다가올 수 개월 간, 우리는 두 개의 한국 중 어느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 먼저 붕괴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이와 관련된 문제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는 약 29,000 명의 미국 군인과 공무원, 수만 명의 민간인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당면과제는 우리가 한국과 관계를 해지할지 여부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조건으로 관계를 해지할 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 미리 계획을 세우는 것만이 현명한 처사이다.
한국 : 아시아의 이스라엘, 또는 차세대 캄보디아?
그렇다면 미국이 한국을 망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 난 그러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해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남한 국민의 정신을 집중시키고 따라서 그들의 국부와 정부 시스템을 공공연히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의 몰살을 옹호하는 핵으로 무장한 전체주의 국가와 나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폭풍을 수용한 한국의 정치적 좌파는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안드레스 닝 등의 운명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히틀러가 그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밝힌 인종청소에 대한 의도를 무시해 버렸던 수백만의 유태인들의 운명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은 우리에게 계속 경고해왔고, 역사도 또한 그래왔다. 북한의 위협이 말 뿐임이 아닌 것에 대한 증거는 너무도 많다.
대한민국이 더 많은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독립성과 국가성(nationhood)을 주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주한 미군을 재편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화된 동맹 체제는 더 적은 수의 미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더 많은 한국인들을 수십년간 지속된 폭격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몇 년 안에 레이저 무기, 초고속 발사체 및 레일건의 조합이 남한을 북한의 포병, 로켓 및 미사일로부터 겹겹의 방어막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미국 의회연구소(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의 희망적인 연구결과도 있었다. 그러한 방어용 무기들이 로켓을 다 막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도발을 비효율적인 자살행위로 만들 정도는 될 것이다. 값은 비쌀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은 부유한 국가이고 만약 그들이 자신을 보호할 의지가 있다면 우리만큼 더 좋은 친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2차 한국전쟁의 결과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는 정치적 요소이다. 이러한 요소는 대한민국이 한국의 국가 정체성(nationhood)에 대한 기준을 제시할 권리가 있는 국가라고 생각하는 믿음과 그들의 정치 체제 및 사회가 투쟁하고 심지어는 죽어가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인식과, 전체주의에 굴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멸종에 이르게 된다는 인식을 말한다. 국가는 그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국민의 자신감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이 자신감은 내부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 빌려오거나 외국의 보증기관으로부터 외부조달 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국민에 대해 미래에 대한 국민 투표를 권유하라
한국 역사가 항복을 향해 기울게 된다면 미군의 계속적인 존재가 그 역사를 다시 되돌릴 가능성은 낮다. 미군의 존재는 대신 수동적으로, 여전히 이 역사를 바로 되돌릴 수도 있을 한국인을 그저 진정시키는 역할만을 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청와대가 자유의 가치와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가 끔찍한 비용을 지출해서 쟁취해 낸 부유함을 조용히 항복시켜 버리는 것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경각심을 갖는 것을 누르게 될 뿐이다. 미군의 존재는 한국인들에게 정신 집중을 방해하고, 국가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의 발달을 저해하고, sisu에 대한 무거운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한국인들의 안보에 현재 시점에서 가장 명백한 위험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이 이 역사의 방향을 돌리는데 무슨 역할을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한국 국민들에 대해 냉혹한 선택과 국민투표를 권유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위대한 영도자 전하(His Porcine Majesty)”와 정상회담을 곧 하게 하자. 그리고 그가 김정은의 제안을 듣도록 하자. 그 후에 트럼프 대통령- 및 존 켈리, 존 볼턴, 짐 매티스 그리고 마이크 폼페이오-이 김정은의 제안이 (*역자 주: 북한의?) 항복에 준하는 것이고, 왜 그런 조건에 합의한 문재인이 멍청하거나 더 나쁜지를 설명하게 하고, 남한은 스스로 항복할 수 있지만 미국은 우리 국가안보를 저해하면서까지 경솔한 정책을 보조해주기보다는 미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이 낫겠다고 미국 국민에게 설명해주도록 하자.
주한미군 병력 감축 혹은 철수 계획 소문을 흘리자(그러나 그런 소문이 사실이냐고 질문 받으면 당연히 부인해야 한다). 여전히 전체주의와 인종학살을 두려워하고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아는 남한 사람들을 일깨우자. 남한을 지키거나 포기하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지 의지도 없고 가치도 없는 자들에게 미국이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일이 아니다.
린든 B. 존슨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아시아 유권자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처리하기 위해 미국에서 9 천 마일, 만 마일 떨어진 곳에 미국의 청년을 보내버려서는 안 된다. 동맹은 양국의 공동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동맹이 군사 점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자살 합의가 되어서도 안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