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덕 예비역 소장
오늘 날,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불순세력들의 활동이 스스로 억제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적화의 길로 가다가, 결국은 김정은 독재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악몽을 떨칠 수 없어 이 사상최악의 국가불행을 막고자 이 글을 씁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6.25의 잿더미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우뚝 세운 것은 온 세계가 놀라는 기적중의 기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진정한 자랑임에도 불평·불만으로 나라의 근본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있으니 오호! 통재라! 이 불행의 씨앗이 어디에서 뿌려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국가불행의 씨앗’이란 신규용어는 35년 군에 몸답고 예편 후 4.3위원 임무를 수행하다가 왜곡된 4.3진상조사 보고서(보고서 작성 기획단장: 당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현 서울시장 박원순)의 채택을 거부하고 사퇴를 해야 했던 예비역 장교의 고통과 고뇌 속 에서 잉태된 단어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씨앗은 북한 동포들이 새빨간 거짓말에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이 우리 교과서에 실리지 않음으로서 ‘불행의 씨앗’이 자랐습니다.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정하의 인민위원회(1946년 2월 8일 구성,위원장 김일성)가 단행한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1946년 3월 5일)으로 한 때 스탈린·김일성 만세소리가 터졌었지만 6.25 정전 직후의 집단농장화 조치로 농민들은 다시 분배 받았던 자기 땅의 노예로 돌아가 배급에 의존함으로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에는 300만이 굶어죽고 오늘에 와서는 3만이 탈북을 계속하여도 거리에 나와서 소규모의 ‘촛불시위’ 한번 도 못하는 인권부재·자유부재의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체제유지를 위한 내부로의 무한독재가 불가피한 북한은 그 연장선에서 우리 사회의 혼란조성도 불가피함으로 서 우리 사회의 불행요인으로 작용)
미 군정 시절, '김일성 특사'가 용도 폐기된 북한 화폐 남한에 선박으로 운송했다
두 번째 씨앗은 미군정하의 38선 이남에도 북한에서처럼 스탈린·김일성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이 생겨났었는데 이 사실 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를 단행했던 인민위원회는 조선은행권 비밀화폐개혁(1947년12월1일, 당시 조선은행권 남북공용)까지 단행한 바, 미군정은 이 사실을 즉시 파악하고 적극 대응치 못했던 결과로 용도 폐기된 북한 화폐가 선박으로 운반되어 공작금으로 전환되면서 국가불행의 씨앗으로 자란 것입니다.
용도 폐기된 북한 화폐를 선박으로 운반했던 ‘김일성 특사’가 존재했었음이 1997 5월 26일 노동신문 특집보도로 확인되며 그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숨어서 받고 팔자를 고쳤던 행운아(?)들은 그 후손들 까지도 김일성에 대한 감사에서 절대충성을 강요받는 종북의 원조가 되어 오늘까지도 북의 지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국가불행 발아의 원인이 되어 왔음을 사퇴한 4.3위원으로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성시백은 대북무역상으로 위장하여 화폐를 선박으로 운반, 그 자금으로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등의 10개 신문사를 운영하는 등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했던 공로로 그 후 ‘북한영웅1호’가 되었던 것이며 그의 공작활동 찬양보도가노동신문에 대서특필(1997년 5월 26일)되었던 사실도 재강조합니다.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 Google에서 제목탐색으로 확인됨)
필자는 4.3위원 사퇴 4년 후에 ‘북한 영웅1호’의 대남공작 찬양보도를 발견하면서 성시백이 4.3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어 이 공작찬양보도에 대한 공론화가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전파노력을 계속해 왔으나 아직까지도 침묵이 유지되는 상태임을 다시 밝힙니다.
북한 영웅 1호로부터 용도 폐기된 화폐를 무상 제공받고 팔자를 고쳤던 행운아(?)들이 대한민국 국가불행의 씨가 된 것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북한의 붕괴 시에는 발생되는 신분의 노출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는 살 수 없게 된다는 스스로의 절박감에서 종북의 원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며 더욱 무서운 것은 북한과의 내통가능성입니다. .
이 가능성은 소위 대한민국의 ‘민주화투사’라고 자찬하는 사람들이 북한사회의 인권신장과 민주화에는 일체 침묵하면서 오히려 대한민국의 민주화·인권신장과 산업화 발전의 1등 공신인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6.25의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까지도 친일파로 몰아가는 억지주장에서도 확인됩니다.
이 기회에 온 국민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중차대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했던 1980년 5.18 사건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제2차 판결(1997년 4월 17일) 직후에 북한 영웅 1호의 공작활동 찬양보도(1997년 5월 26일)가 있었다는 연관성입니다.
대통령 김대중은 이 사실에 침묵한 채 63명의 미전향장기수를 북송해 주었고 대통령 노무현은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주장하면서 한 차례씩의 정상회담을 하며 일방적 퍼주기에 전념했던 것이니 그 당시 이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누구였으며 오늘 현재는 어느 위치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지에 온 국민들의 관심이 지향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최근의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논란에서 비롯되었던 문제인 대통령 출마예정자의 대북 자세에 대한 많은 의문·질문이 최순실 파문으로 막혀있는 현실을 통탄하면서 이 기회에 5.18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제 2차판결(1997년 4월 17일)직후에 있었던 대남공작 찬양보도(1997년 5월 26일)에 대한 침묵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추가질문으로 확대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1997년 4월 17일과 1997년 5월 26일의 연계성에 온 국민들이 관심이 생겨나기만 한다면 대한민국 언론들의 보도태도도 달라져서 최순실 사건으로 촉발되고 있는 광화문 촛불시위에서의 분노표출도 진정이 되고 조국의 땅과 바다와 하늘을 지키고 있는 현역의 육해공 및 해병 장병들도 예상되는 각종 도발에 경계의 큰 눈을 뜨고 부여된 임무완수에 더욱 매진하게 될 것을 확신하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릅니다.
(이 글은 90세를 넘기신 원로선배님들이 자유통일 후에 고향 땅을 밟게 되시는 그 날까지 계속 강건하시기를 축원하는 평안북도 정주 군민회의 경로잔치에 참가하고 돌아와 기고했던 1년 전의 글을 최근의 최순실 파문을 바라보며 추가로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