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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은 제2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911전 계획된 아프간 침공에 겁먹은 파키스탄, 중국과 동맹
-알 카에다는 역내 불안 조성 위한 미국의 도구
-브레진스키가 아프간 공산정부 테러 위해 빈 라덴 고용
-항공기에 매달린 아프간인들, 미국이 고용한 요원
-인권에는 눈감으며 자원수탈에만 몰두하는 미 외교정책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사실 미국이 NATO라는 조직 뒤에 버티고 앉아 에너지 패권을 움켜쥐기 위해 유럽 각국을 상대로 벌이는 제2의 아프간 전쟁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번에도 미국은 자신들의 탐욕에 부역하는 멍청한 지도자들을 앞세워서 한 나라를 통째로 거덜내는 과정을 택했으며 미디어를 총동원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가짜뉴스를 양산해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러시아는 더 이상 미국에게 당하기만 하는 미련한 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지정학 칼럼니스트 Thierry Meyssan 작년 8 20일 미국의 아프간 철수 사태를 바라보며 이를 둘러싼 서방의 여러 거짓 보도를 폭로하는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7가지 거짓말]이라는 칼럼을 볼테르 네트워크에 게재했. 프랑스인으로서 필자는 줏대 없는 지도자들로 인해 프랑스가 힘없는 약소국들에게 벌이는 영미의 악행에 동참하게 된 데 격분하고 있다. 아프간 사태를 통해 미국의 교활하고 음험한 외교정책에 대한 그의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자


 

 

서방 언론들은 카불 함락 사건을 취재하면서 서구식 선전의 7가지 거짓말을 정신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서구세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고, 워싱턴이 준비해둔 아프간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탈레반이 가장 사악한 집단이 아니라면 과연 이 모든 미친 일들은 왜 벌어진 걸까? 


 

 

2021 8 1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탈레반의 카불 함락에 대해 대국민 연설을 했다.

 

1. 아프간 전쟁은 9.11 테러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획됐다.

 

이 두 정치인에 따르면, 2001년 미국의 유일한 아프가니스탄 침공 목적은 "2001 9 11일 우리를 공격한 자들을 추적하고 알 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을 추가 공격 기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독일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열 번 반복된 거짓말은 거짓말로 남지만, 만 번 반복되면 진실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크롱과 바이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2001년 아프간 침공이 7월 중순에 이미 결정됐다는 것은 팩트이다. 당시 이 전쟁은 한편으론 미국과 영국간의 베를린 협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간 정부가 아닌 탈레반과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파키스탄과 러시아는 이 비밀 회담에 참관국이었다.

 

탈레반 대표단은 UN안보리의 여행 금지령을 어기면서 독일로 들어갔다. 협상 실패 후, 파키스탄 외무장관 나이즈는 자국으로 돌아가 경보를 울렸다. 이후 파키스탄은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이로써 중국은 인도양으로 향하는 관문(실크로드와 더불어)을 손에 넣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이집트에 군대 4만명을, 아라비아 해에는 거의 모든 영국 함대를 주둔시켰다. 9/11 공격이 벌어진 것은 이 협정이 체결된 직후였다.

 

2. 알 카에다는 앵글로 색슨족에 대한 위협 아닌 도구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 카에다의 테러 위협을 줄이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는 우리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알렉상드르 드 마랑슈는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 가둬 두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프랑스의 대외 비밀첩보국장인 알렉상드르 드 마랑슈가 피네이 서클의 (각국에 테러를 일으켜 공산주의 국가나 개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멸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역자 주*) 프레임워크 안에서 CIA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유발하여 그들을 그곳에 가두자고 제안했다.


*피네이 서클(the Pinay Circle: 소련을 폄하하고 유럽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위한 비공식 조직으로 프랑스 우파 정치인 앙투안 피네 평의회 의장의 이름을 붙임)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베이루트에서 반공사상이 투철한 억만장자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내 아프간 공산정부에 맞서 테러운동을 주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빈 라덴은 세계반공연맹 회원인 카밀 샤문 전 레바논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베이루트에 있었다.

 

미국은 두 가지 이유로 빈 라덴을 선택했다.

첫째, 그는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이 조직을 통해 병사들을 모집할 수 있었으며, 둘째, 그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건설 회사의 상속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만큼 힌두쿠시 산맥의 지하강을 군통신루트로 바꿀 수 있는 인력과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이후, 바로 그 오사마 빈 라덴은 1992~94년 보스니아 대통령 알리자 제트베고비치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의 병사들도 따라갔다. 그들은 <아랍 군단>을 위해 <무자헤딘>이라는 이름까지 포기했다. 빈 라덴의 캠프에 러시아 특공대가 방문했다가, 포로로 붙잡혔다. 그러나 체포되기 전, 그들에겐 빈 라덴의 지휘실을 수색할 시간이 있었는데 군 문서들이 전부 아랍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중에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의 전투기를 일회성 작전에 사용할 정도가 됐다. 그는 아랍어로 <알카에다>, 즉 자신이 가진 <명단>으로부터 필요하면 얼마든지 병력을 고를 수 있었기 때문에 청탁을 일삼았다. 따라서 오사마 빈 라덴이 수년간 미국의 요원이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배신했다는 미국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쨌든 오사마 빈 라덴은 중병에 걸렸다. 그는 무균실에서 매일매일 간호가 필요한 상태였다. 따라서 2001 7월 르 피가로지가 밝힌 바와 같이, 그는 두바이에 있는 미국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원 측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부인했지만 셰이크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인(현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이 그곳에서 현지 CIA국장이 동석한 가운데 빈 라덴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확인해줌으로써 사실로 밝혀졌다.

 

결국 오사마 빈 라덴은 파키스탄 라왈핀디의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거기서 2001 12월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열렸으며, 이 사안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영국 MI6 파견요원 2명이 참석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CIA 고용주들에게 등을 돌렸다는 가설이 거짓이라는 주장 또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즉 그의 소행이라고 알려진 사우디의 호바르 타워와 케냐 나이로비 및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미국 대사관 테러사건 이후인 1999년까지도 그는 런던에 홍보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태인과 십자군에 맞선 빈 라덴의 '지하드(Call to Jihad: 聖戰)'는 이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10여년간 우리가 보고 들었던 <범인은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주장해대는 사람들의 기록에는 오로지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만 속아 넘어갔다. 당시 대형 은행들이 골치 아픈 사건에 써먹던 Dalle Molle 인공지능 연구소의 스위스 전문가들의 주장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기록들(오사마 빈 라덴이 9/11 테러에 책임이 있다는 펜타곤의 발표를 포함해서)은 위조됐으며, 실제 빈 라덴과 일치하지 않는다. 당시는 안면 및 음성 인식이 특수 기술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흔한 기술이다.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누구나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빈 라덴의 사망 이후,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알 카에다의 수장이 되었으며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을 감독했던 자와히리는 2001년 이후 몇 년간 바쿠(아제르바이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살았다. 적어도 그 기간 동안 그는 테러리스트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기간 동안 미 해병대의 보호를 받았다. 현재 행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더 이상 미국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믿을 이유도 없다.

 

3. 미국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대테러"가 아닌, <자금과 무기테러>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카불 함락과 관련한 연설에서 미국이 아프간에 가 있는 이유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테러와 싸우기 위해서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은 20년 동안 반복돼 왔지만, 그 말에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테러리즘은 철천지 원수가 아니다. 전투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전세계 모든 군대가 특정 상황에서 테러를 사용할 수 있다. 냉전 기간두 진영 모두 상대 진영에다 이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이 군사 기술의 사용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테러>하면 서구인들은 우선 몇몇 대도시에 대한 공격을 떠올리지만, 최악의 사태는 사악한 <레반트의 이슬람 국가>와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에미리트까지 더 넓은 중동 지역에 소규모 테러국가들의 출현과 더불어 완성됐다.

 

아프간인, 이라크인, 리비아인, 시리아인들은 처음에는 사건에 대한 미국측의 이야기를 믿었지만, 더 이상은 속지 않는다. 20년 간의 전쟁 후, 그들은 미국이 어떤 바람직한 결과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은 테러와 싸우기는커녕 테러를 실행할 조직, 재정, 군비 집단을 만들어낸다.

 

4. 탈레반은 전쟁을 한 게 아니라 미국이 주는 걸 받았을 뿐이다.

 

마크롱과 바이든 대통령은 탈레반의 <카불 점령>에 대해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다. 그들 말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지도자들이 포기하고 도망쳤다.”고 했다. 아프간 군대는 가끔이나마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졌다. 하지만 서구의 군용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도망쳤을까? 그리고 아프간 군대는 <가끔씩 싸움을 걸었던> 게 아니라, 반대로 <가끔씩> 싸우려 했을 뿐이다. 아프가니스탄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했다. 미군들은 홍채 인식을 포함한 전자적 수단으로 모든 사람의 신원을 기록했다.

 

아프간 군대는 미국, 프랑스 및 다른 나라들에 의해 매우 잘 훈련된 30만 명 (프랑스 정규군보다도 많은)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정교한 장비들로 지나치게 중무장 되어있었다. 보병들은 전부 방탄복과 야간 투시 시스템으로 무장했다. 공군력 또한 매우 유능했다. 반면 탈레반은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이는 3배가량 적은 숫자다. 그들은 샌들 신고 자동 소총 칼라쉬니코프들로 무장한 깡패들이다. 공군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훈련된 조종사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전투가 있었다면  분명 패했을 것이다.

 

정권 교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결정됐다. 5 1일에 일어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그 시간표를 변경해 버리면서 역사가 바뀌었다. 그는 이 지연상태을 이용해 주변국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최소 1만 명의 용병을 파견했다. 그는 이미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던 터키군을 동원했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터키는 이미 이들리브(시리아)에 살고 있는 지하드 요원 최소 2000명을 채용했으며 계속 모집중이다.

 

소련과의 전쟁 기간,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미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이자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에 이슬람 사원을 개장한 민병대 <밀 괴뤼>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아프간 지도자이자 미래의 총리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은 이렇게 두 배나 되는 능력에 있었다. 헤크마티아르는 이후 알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의 보호 아래 2019년 아프가니스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동맹국은 몇 달 전부터 자국민을 송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9 11일 이전 혹은 최악의 경우 8 30일 자정 전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인도의 은행 휴무일인 8 15일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결정을 내렸다. 이는 인도를 향한 일종의 경고였는데, 이 나라는 속으로는 다른 민족을 지지하면서도 가니 대통령의 파슈툰족이 아크훈자다 왕의 부족으로 교체될 것이라는 사실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카불 공항에서 우리가 보았던 패닉 장면들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했을 때 사이공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아주 똑같았다. 항공기에 매달린 아프간인들은 서방 대사관 출신이 아닌 대부분 오바마 대통령 시절 결성된 '오메가 작전'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코스트 보호군(KPF) <피닉스 작전>의 베트남군처럼 반군 보조기관인 아프간 국가안보국(NDS)의 일원이다. 그들은 외국의 점령에 반대하는 아프간인들을 고문하고 죽인 책임이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탈레반은 소년 성가대원처럼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곧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5. 미국은 중국에 아프가니스탄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중국 기업들로 하여금 아프간의 보호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미국에게는 애초부터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정착시킬 마음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손해본 건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20년 동안 1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 지역이 불안정해져서 어떤 정부도 거기서 일어나는 천연자원 수탈을 통제 못하는 상태다. 어느 선진국 기업이든 미국의 보호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그 기업들에게서 뜯어먹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세계화 계획으로, 사막의 착취 현장을 감시하기 위해 해외로 파병된 특수군 부대를 거느린 군산복합체가 지키고 있다.

 

이 전략은 조지 W 부시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와 이미 미군을 전산화해 놓은 아서 세브로우스키 제독에 의해 개발되었다. 2001 9 11, 그것은 미군 참모들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그것은 세브로스키의 대리인인 토마스 바넷의 저서 [펜타곤의 새로운 지도]에서 대중에 알려졌다.

 

부시 대통령이 <끝없는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영원히 테러와 싸우거나, 오히려 이 지역에 정치 조직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영원히 테러집단을 조직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 중국 기업들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광산업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미국에 대가를 치르거나 테러 공격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부정한 돈벌이라면 어떨까?

 

6. 서양인들은 계몽주의를 세속주의로부터 방어하지 않고 오히려 도구화한다.

 

미국의 영부인 로라 부시 여사는 감히 매니큐어를 발랐다는 이유로 탈레반에 의해 학살당한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우리 모두를 울렸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1978년 카터 대통령,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알렉상드르 드 마랑슈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지했을 때, 그들은 여학교를 신설 중이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소련 동맹국들과의 싸움이 인권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이 오늘날 탈레반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더 넓은 중동의 천연 자원이라는 막대한 부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것이 인권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에서만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지해 온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인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이 파키스탄을 반소비에트 전투기지의 후방 기지로 활용하도록 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샤리아 법을 다시 세웠다. 1990년대 파키스탄 총리였던 부토 대통령의 딸 베나지르 부토도 탈레반에 의해 암살당했다.

 

서방 반군들의 범죄를 다시 들출 필요도 없다. 카불 공항에서의 협력자들의 패닉만으로도 사태 파악은 충분하다.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가 아프간인들을 조종하고 서방을 소탕하는 데 이용되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생명은 이러한 개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민족적 분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약 15명이 가장 큰 파슈툰족이며 이들은 파키스탄에서도 강하게 대표된다. 아프간은 여전히 부족국가이며 아직 정식 국가가 아니다. 다른 민족들도 공존하기 때문에 역내 다른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7. 프랑스가 아프간내 미국의 범죄를 항상 지지해 온 것은 아니지만 사르코지 대통령 이후부터는 그래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미 2001 10월부터 프랑스가 이제 막 자국 땅에 끔찍한 공격을 당한 미국의 우방국들과 연대하여 국제 행동에 동참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슬람 테러의 성역이 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직접 우리의 영토와 동맹국들을 겨냥한 테러 위협에 맞서 싸운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말이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프랑스 특유의 갈등을 없애기 위한 교란작전이다. 2001 10월 시라크 대통령은 앵글로색슨족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프랑스군이 동참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386호에 따라 겨우 군사배치를 승인했을 뿐이다. 프랑스 병사들은 실제로 나토의 명령을 받았으나, 국제안보원조군(ISAF)의 일원으로서 움직였다. 단지 재건 지원에만 관여한 것이다. 포로를 생포하지는 않았지만, 병사들을 체포해 즉시 아프간 정부에 인계했다.

 

이러한 위상을 바꾸고 프랑스를 미국의 범죄에 연루시킨 사람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다. 프랑스가 현재 KPF(코스트 보호군) NDS(아프간 국가안보국) 대원들을 추방하는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대가를 치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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